추천도서
[2018 시사인 올해의 책] 우울할 땐 뇌과학
내 몇 없는 장점 중 하나는 기분을 잘 숨긴다는 거다. 나처럼 기쁨과 슬픔을 크게 느끼는 사람은 이런 능력이 중요하다. 감정 기복도 심한데 숨기지도 못하는 상사를 상상해보라. 여러 사람 신경 쓰이게 했다는 걸 알게 되면 본인은 얼마나 창피할까. 다만 나도 감정을 못 숨기는 예외가 있는데, 애인이다. 얼마 전에도 우울한 기분을 숨기지 못해 ‘이불 킥’ 할 일을 벌였다. 옆에서 다가오는 자전거를 미처 보지 못하고 길을 건너려던 나를 애인이 급히 잡았다. 그 순간 어이없게도 눈에서 물이 나오고 말았다. 얘가 평소보다 세게 잡아당긴 것 같다, 혹시 내가 싫어졌나, 나는 왜 이렇게 덤벙댈까, 이 성격 영영 못 고치겠지 같은 생각이 머릿속을 지나갔다.
다행인 건 뇌의 다른 부위에서는 이런 생각도 만들고 있었다는 점이다. <우울할 땐 뇌과학>에서 봤잖아. 우울한 뇌가 나를 속이고 있는 거야. 실수를 감지하는 ‘배측 전방대상피질’은 온 뉴런이 잘못에만 집중하게 만들고, 불안에 영향을 주는 ‘편도체’는 잔뜩 예민해져서 애인의 반응과 내 미래를 부정적으로 해석하고 있어. 책은 이걸 ‘우울증의 하강나선’에 빠지는 거라고 표현했지. 우울한 뇌가 나를 더욱 우울하게 만든다고. 어디 한번 계속해봐라, 이젠 안 속지.
물론 거짓말이다. 또 속는다. 내가 고작 인간이라서 보고 느끼고 판단하고 행동하려면 뇌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. 이건 마치 꿈을 꿀 때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는 얼토당토않은 장면을 뇌가 만들어내도 그 순간만은 진짜라 믿고 바람을 느끼는 것과 비슷하다. 그날도 나는 우울한 뇌한테 속는 줄 알면서도 눈에서 물이 나오고 미간에 주름이 잡히고 팔다리가 얼었다.
이다솔 (<동아사이언스> 기자)
https://www.sisain.co.kr/?mod=news&act=articleView&idxno=33644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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